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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필연

우리_은하 2017. 9. 4. 01:47




탑성 전력 114분
 
[전화번호/가을]
 
필연








흰 눈이 내리지 않는 크리스마스였다. 별 생각 없이 거리를 거닐다 그가 눈에 밟혔다. 내가 그를 아주 멀리서부터 다시 멀어질때 까지 그는 꼼짝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라고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친구의 전화를 끊고 그가 서 있는 장소 바로 앞의 건물 2층을 올라가 따뜻한 바닐라라떼를 주문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10분, 30분, 1시간. 춥지도 않은지, 얼어서 움직일 수 없는지, 그는 정말 1시간이 넘도록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순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와같이 약속을 퇴짜맞은 것 같아보이는 그와 동방상련을 느낀것인지, 추운 날씨에도 정승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가 대단해 보였는지, 왜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냥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그의 그것을 원했다. 홀린 듯이 일어나 차갑게 식어버린 바닐라라떼를 카운터에 가줘다 주는것도 잊은 채, 그에게로 곧장 걸어갔다. 추운 겨울, 엄청난 인파, 조금 늦은 오후. 그와 나의 첫 대화를 나눈 순간이었다.

"저기요."
"...네?"
"제가 그쪽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데, 전화번호를 얻을 수 있을까요?"
"...네?"









필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를 당황하게 한 크리스마스의 그날에 난 전화번호를 얻었다. 그는 사생활이 노출되는걸 꺼려하는 것 같아보여 그럼 예명으로 저장해 둘께요! 저도, 예명으로 알려드릴께요. 서로 예명으로 부르는거에요. 이거면 어떠나요? 재빠르게 말했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나 되게 필사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쩐지 더 황당해 보이더라. 이상하게 생각한건 아니겠지...

새학기가 시작되고 슬슬 벚꽃이 피면서 주위의 비염과 알레르기 환자들이 고통받는다. 그리고 난 새로운 어려움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겨우 문자를 하는 사이가 되었거만, 그는 바쁜건지 내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에 아무 불만은 없다. 내가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고, 내 문자에 그가 무조건 답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날 차단하지 않는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으니까... 무례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었지만 그가 보내준 답장은 이런 내 불안을 싸그리 없애주었다.

'가을씨(그는 예명을 가을로 했다.) 제가 다짜고짜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는데 받아주셔서 감사해요ㅠㅠ 혹시나 기분 상하시거나 무례했다고 생각하시면 언제든지 제 연락 거절하셔도 되요!ㅠㅠ'

'기분이 나빴거나 싫었다면 아예 번호를 드리지 않았을거에요.'

내가 이 사람과의 연락을 이어가야 할 이유가 늘었다. 이유는 그냥. 이 답장에 기분이 좋아지고 안심이 놓아지는데 연락을 끊운 이유는 없지 않는가. 그의 답장이 적어지는데 그에 비례해 내 연락도 줄어드는 게 최근 내 고민이다. 나라도 혼잣말이라도 계속 해야 하는데!

'겨울씨(그가 예명을 가을로 하자 흐름상 겨울로 해야 할 것 같았다)가 보내주시는 일상을 읽으면 저도 그 일상에 함께하는 것 같아요.'

라고 하는데! 시간을 일부러 내면서까지 그와의 연락을 이어가야 하는데! 벌써 그에게 보낸 마지막 연락이 일주일 전이다. 집에 가서 연락을 하고 싶어도 자동으로 내려오는 눈꺼풀에 실패하기 일수였다. 나도 바쁘고 그도 바쁘다니. 난 그를 잊을 수 없지만 그는 잠시 스쳐가는 인연으로 날 잊을 수 있다. 내 전화번호가, 겨울씨 라는 예명이 연락처에서 지워질 생각만 하면 생존을 위해 밀려오는 식욕도 증발한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또다시 실례를 범하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가을씨는 전화가 좋아요, 문자가 좋아요?'

이거야말로 연락처에서 지워지는 이유가 되지 않는걸까 라는 후회와 다짜고짜 전화를 하는것보단 나은 방법이라는 뿌듯함이 동시에 마음속에서 엉키고 있을 때, 의외로 빨리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 카톡이 좋아요.'

지금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과 썸을 탄다고 연애세포가 급속도로 늘어난 친구를 붙들고 답장을 어떡해 해야 하냐고, 내가 잘한거 맞냐고, 이게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고 싶다. 실수한건가! 아님 진짜 카톡이 좋은건가! 그럼 지금까지의 문자는 별로였던건가!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소심한 생각에 머리가 터질 지경에서야, 답장을 미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 성급히 그에게로 카톡을 보냈다.

'가을씨는 카톡이 좋다고 하셨으니 이제부터는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건 어떨까요?'

이젠 그가 날 소심한 사람으로 이미지 박히면 어쩌지라는 걱정 속에서 카톡의 1이 사라졌다. 읽었다!

'정말 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좋아요.'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필연







연락 방식을 카톡으로 바꾸고 소매 끝이 사라졌을 때까지 나는 카톡 알림음을 키고 데이터도 항상 키고 다녔다. 그래, 소매가 사라지고 선풍기는 소용이 없어지고 에어컨 세상에서 살고 싶어질 때 그의 전화번호가 바뀌었다.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어? 평소와 같이 그에게 카톡을 하려고 대화방에 들어갔을 때, 오랜만에 그가 먼저 보낸 카톡은 자판을 치려는 손가락을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듯, 카페의 시끄러운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올 때 메로나를 사오라는 누나의 문자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연락처에 들어갔는데 그의 연락처로는 더 이상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먼저, 연락을 끊었다. 왜?

어제까지 그는 내 카톡을 읽고 중간중간 답장도 해주었다. 처음 시작할 때 부터 쭉 읽어봤지만 여전히 그가 왜 연락을 끊은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몇번을 계속 읽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내 말실수를 찾아내려고 반복해서 읽기만 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냥 말실수를  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래야 그에게 다시 카톡을해서 사과를 하고 다시 전처럼 연락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누나의 짜증내는 전화를 받고서야 내키지 않는 걸음을 겨우 떼고 집으로 돌아갔다. 야 최승현! 메로나는!

현실을 마주보고 싶지 않아 그와의 문자, 카톡을 모조리 다시 읽었다. 감정을 이입해서 그때의 상황을 다시 떠올리고 그때의 설렘을 다시 느꼈지만 다시 현실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내일은 조금 더 시원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전 이만 잘께요! 가을씨도 시원한 밤 되세요~!^^ 마지막 메세지에 달린 카톡. 겨울씨도 이름같은 밤을 보내세요. 이 글을 읽고 내일은 얼마나 더 즐거울까 라는 설렘으로 잠을 잤던게 생생한데. 점점 커져가는 설렘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분명 먼저 연락을 끊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을 리가 없다. 내가 그에게 먼저 호감을 보였는데. 그와 가까워지고 싶어 말을 건 것인데. 이대로 끝낼 수 없지만 그에게 귀찮음을 주지 않고 싶은 두 마음이 충돌하다 어느새 마지막 카톡은 2주가 되었다.

그의 카톡계정과 카톡방은 사라지지 않았다. 연락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대로 그와의 연락이 끊기는 것이 싫고 이해가 되지 않아 자판을 눌렀다. 내 이기심이고 그에게 부담을 주거나 질려할 수 있겠지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절박하지 않지만 난 너무나도 절박하니까. 그에게서 더 이상 처음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새로운 간질거리는 감정이 느껴진다. 좋아하는 와인을 먹기 직전의 그 간지럽고 기분 좋은 감정이.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고 카톡을 보냈다. 그의 답장이 두려워 서둘러 핸드폰 전원을 껐다. 까만 액정을 보면서 카톡에는 손을 대지 않은걸 보면 조금이라도 내 연락을 기다린건 아닐까, 나와의 연결고리를 아예 없애고 싶은 마음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이내 이래봤자 진실은 그만 아는걸 라는 생각에 고민을 끝냈다.

'가을씨, 연락을 계속해도 될까요?'

정확히 24시간 후에 킨 핸드폰에는 지인들의 온갖 걱정과 짜증의 연락이 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필연








연락이 끊긴지 한달하고도 일주일이 지났다. 누나는 연애하냐고 물었고 친구들은 술을 사주겠다고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썸을 탄 줄 알았고 차였다. 완전히. 아직도 내 카톡 알림음은 켜져 있었고 데이터는 항상 키고 다녔다. 핸드폰을 키면 할일을 제쳐두고 그와의 카톡방을 들어가곤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 정말 질척인다.

그렇게 단풍이 들기 시작할 때, 그에게서 카톡이 왔다. 정말 기적적으로. 꿈을 꾸는건 아닌지 믿기지 않았다.

'연락을 계속해요. 이젠 저의 계절이네요.'

그가 먼저 카톡을 할 때는 언제나 장난으로 시작했었다. 재미있든, 재미가 없든. 아, 다시 그이다. 예전과 다름없는 그. 엇갈려진 톱니바퀴가 다시 맞물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를 처음 만난 눈이 내리지 않았던 크리스마스가 재현되는 착각이 들었다. 다시 시작이다.

'다시 연락해주셨네요.'
'제가 너무 무례한건 아니었죠?'

상황이 변했다. 이제 그가 나에게 조심스러워졌다. 반면 난 대담해졌다.

'무례하긴요. 다시 연락해주셔서 감사해요. 이거 마치...'
'마치?'

귀여워.

'우린 필연인가봐요.'
'그러네요.'
'네...?'

덜컹덜컹 비포장도로를 운전하는 착각이 든다. 그는 나를 위해 꼭꼭 잠가두었던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그대로 달려가 문을 열어준 그를 팔이 아프도록 안아줄 일만 남았다. 그와의 연락을 시작하면서 보내고 싶었던,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고 있어요? 라는 말은 필요가 없어졌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가 잘 보내는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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