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뇽토리
[보랏빛 향기]
봄(上)
승현아, 너에게서 보랏빛이 보여
꽃이 피는 3월에 너를 만났다. 하얀 눈은 옛적에 다 졌는데 너의 주변에서만 아직도 내리는 것 같이 하얀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던 너. 겉모습은 하얗지만 안은 보랏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너에게 말을 걸었다. 가만히 앉아서 탁자 위의 커피만을 만지작거리던 너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처음에는 무시할 줄 알았다. 너의 소문은 내 귀에도 들어왔었으니까. 소문대로 하얀 얼굴은 눈처럼 아름답지만 손에 닿은 온기에 차갑게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로는, 글쎄다. 너의 속이 보라색이여서 그랬나?
어쨋든 나는 큰 용기를 내었고, 주변 친구들은 응원을 해 주었다. 이게 뭐라고.
"안녕?"
이때의 내 목소리는 떨렸니? 바보같았니? 싸가지가 없었니? 그때의 난 뇌의 기능이 정지되었고 너의 목소리가 아닌 이상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온 세상은 너를 제외하고는 흑백에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안녕"
안들릴 줄 알았던 너의 목소리가 뇌의 기능을 활성화시켰고, 주변의 온갖 소음이 들려왔고, 또한 흑백이었던 세상에 색이 입혀지고 사람들은 다시 평상시의 속도로 움직였다. 와, 난 이날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들었다는 너의 목소리를 나도 듣게 된 것이다. 고운 미성, 더 듣고 싶었다.
"앉아도 될까?"
다짜고짜 앉아도 될까라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뇌는 다시 움직였지만 입은 뇌를 거부했다. 날씨가 좋네, 나 알아? 등 예의있게 할 말은 많았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그런 말들 중에서 앉아도 될까라니. 한심하다.
"그럼. 자리 비었어"
눈쌀을 찌뿌릴 줄 알았던 너는 도리어 방긋 웃고는 더 듣고 싶은 그 미성을 다시 들려주었다. 미소가 얼굴보다 더 환하다. 눈이 멀 것 같은 미소를 보면서 이대로 눈이 멀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음료 뭐야?"
제발 망할 내 입아, 혼자서 독무대를 만들지 말아줘.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 투명 플라스틱컵에 담긴 음료는 단 하나뿐인, 녹차였다. 당황한 너를 보고 나는 정말로 이대로 유리창을 깨고 옆의 횡단보도로 몸을 던질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녹차, 그린티야"
웃음기가 듬뿍 묻은 채로 굳이 말하는 너를 보면서 소문과는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소문속의 너는 냉철하고, 오만하고, 또 재미없었다. 그런데 막상 너와 대화를 하다 보니 현실속의 너는 따뜻하고, 배려있고, 또 재치있다. 거기에 고운 미성까지. 소문을 퍼트린 아이들은 분명 너와 단 한번도 대화를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짜증보다는 기쁨이 먼저 찾아왔다. 현실속의 매력있는 너는 나만이 알고 있다는 기쁨. 그리고 너의 미성을 듣게 되었다는 묘한 승리감까지.
"...농담이야"
푸핫! 더 이상 참지 못한 너는 내 얼굴이 화끈거릴새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화의 미성도 너무 좋았는데 웃음소리의 미성은 더욱 좋다.
"너 되게 웃기다!"
너가 더 웃긴걸. 수줍은 첫사랑을 하는 아이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었다. 그런 널 용기내서 바라보지 않은 내가 후회된다. 웃는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승현아, 너가 보랏빛을 만드는구나
봄이 한창인 4월에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번호를 교환했고, 서로의 집에도 놀러갔으며, 취미를 공유했다. 서로에 대해서 조금씩, 천천히 알아가기 시작했다. 음식, 버릇, 가족 등 이야기거리가 생겼다 하면 쉴새 없이 수다를 떨곤 했다.
"윽, 이 집 파스타 너무 맛없다"
"야야 소리가 커! 조금만 줄여"
"부정은 안하네? 너도 그렇지?"
"목소리가 너무 크다니까!"
"여기 다시는 오지 말자!"
딱 한입을 먹고 맛 없다, 라고 판단한 파스타 집에서 우리는 콜라를 원샷하고 그대로 계산을 하고 나왔다. 먼저 나왔던 너의 크림파스타는 소스가 잔뜩 굳어 더 맛이 없어 보였다.
"돈만 버렸어.."
"그러게. 배는 여전히 고픈데"
"저기 카페가자!"
"난 케이크!"
"좋아! 난 녹차!"
식사 후 항상 카페로 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자주 만나지만 항상 어색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10년지기 친구처럼 가까웠고 편했다. 그래, 너는 그랬을 것이다.
너는 녹차를 정말 좋아했다. 처음 말을 걸었을 때도 너는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웬만한 음료는 다 마시는 나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음료를 마셔보라고 권유를 해도 굳이 녹차만 고집한다. 종알종알 말을 하는 너를 눈이 아닌 입을 보면서, 방금까지 마시던 녹차맛이 날까 궁금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녹차를 마시지 않았다.
먹고 먹고 또 먹고. 한달간 우리는 먹기만 했다. 만나서 정말 먹기만 했다. 수다는 덤으로 딸려오고. 문득 돌아보니 4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먹방친구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게 싫다. 먹방친구라니. 내가 원하는 관계는 그쯤이야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관계이다. 먹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관계가 아닌, 먹는 것은 그저 하나의 행동으로 여기는 그런 관계를 원한다.
"너 내일 시간 있냐?"
평소대로 녹차를 두 손에 쥐고 쭉쭉 마시던 너에게 물어봤다. 처음 말을 걸었을 때처럼 긴장이 되었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아니겠지,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겠지. 손이 축축해져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응. 왜?"
"내일 영화보자"
데이트를 신청했다.
승현아, 너가 좋아하는 꽃은 보라색의 아네모네구나
봄이 끝나가는 5월에 우리는 데이트를 했다. 이곳저곳 놀러다녔다. 영화관은 당연하고 충동적인 1박 2일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피씨방에서 밤을 새보기도 했고. 정말 많이 놀러다녔다.
영화보기로 한 날, 나는 너가 무슨 영화를 좋아할 지 몰라 무난한 코믹으로 골랐다. 다행이도 너는 그 영화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고,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우리는 평소대로밥을 먹고 후식을 먹었다. 이야기는 한층 재미있었다. 영화 이야기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목소리는 잔뜩 흥분했고 말은 빨라졌다. 그런 너를 나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니? 행복한 눈이었을거야. 난 행복했거든.
한창 놀러다니던 중, 너가 처음으로 가고싶은 곳을 이야기했다. 아주 기뻤다. 내가 무작정 너를 끌고 다니던건 아니었는지 슬슬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너와 도착한 곳은 세계 꽃 축제 박람회. 비닐하우스에서 진행되었던 그곳에는 색색깔의 꽃들과 여러 향기들로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꽃 좋아해?"
처음 만나 먹던 음료가 녹차라고 물었던 질문만큼 한심한 질문이었다. 말을 내뱉자 마자 당연하지 병신아! 안그럼 여길 왜 오자고 했겠냐!가 내 입을 때리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고맙게도 그새 나에게 적응 했는지 처음과 달리 당황하지도, 웃음기도 없이 덤덤하지만 기쁘게 답해줬다.
"응. 너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뭐야?"
실은 나는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당시에도, 지금도. 예쁘지만 시들어 버리고 벌레가 꼬이는 귀찮은 존재였다. 그런 내가 좋아하는 꽃? 있을리가.
"어- 하얀 장미"
딱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하얀 장미였다. 빨간 장미만 보다 하얀 장미를 처음 보아 시선을 빼앗겼었다. 그리고 하얀 장미에서 너를 보았다. 나는 하얀 장미가 좋다.
"난 아네모네"
응? 그게 뭐야? 생소한 이름..같은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오묘한 이름이다. 어느꽃인지 몰라 두리번 거리지만 매치되는 꽃은 없었다. 뭔가 말을 이어야 하는데, 어느새 너는 저만큼 가 있었다. 발만 동동 구르다 후다닥 너를 따라갔었다. 하얀 장미를 뒤로 하고는.
"이거야"
"이거?"
"응. 아네모네"
한참을 말없이 걷다 어느 꽃 앞에 멈춘 너. 보라색의 오밀조밀 작은 꽃들이 모여 커다란 보라색의 잔디를 이루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수수하고 색이 고왔다. 너무 연하지도, 또 너무 진하지도 않은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아네모네는 딱 너를 닮았다. 너를 닮은 꽃을 좋아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박람회를 구경했다. 출구로 나가는 길 앞에, 박람회의 꽃을 살 수 있는 작은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너는 그곳을 힐끔 바라보기만 할 뿐, 그대로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나는 너를 따라가지 않고 코너로 들어갔다.
"여기"
코너에서 꽃을 사고 나오자, 많은 사람들의 인파에서 떨어진 외딴 길에 우두커니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너가 보였다. 그대로 다가가 뒤에서 꽃을 어깨너머로 내밀었다.
으억! 화들짝 놀래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너에게 꽃을 품속에 넣어주었다. 하얀 장미. 내가 즉석에서 좋다 한 그 장미를 선물해주었다.
"이거 나한테 주는거야?"
"응"
"아, 나도 뭘-"
"내껀 이미 내가 샀어. 자자, 신경쓰지 말고. 하얀 장미, 마음에 들어?"
"응. 이쁘다. 고마워."
마치 내가 이쁘다고 칭찬받는 느낌을 받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얀 장미에 얼굴을 가까이 대 냄새를 한동안 맡는 너는 꽃의 여왕이라는 장미에게 전혀 꿀리지 않았다.
"케이크는 내가 사 줄께"
"아냐! 괜찮다니까! 꽃은 내가 사주고 싶어서 산거야. 꽃 박람회에 가자한것도 고맙고해서"
이해 못했지만 수긍해줘서 고마워. 장미를 건내주었던 내 오른팔은 걸을 때 마다 앞뒤로 흔들거렸지만 등 뒤의 아네모네를 들고 있는 내 왼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너에게 나를 주었고 나는 너를 가졌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